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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이홍채 <광주광역시교육청 행정국장>

 -광주학생독립운동 88주년을 보내며

 

지난 11월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 88주년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에서 거행된 광주학생독립운동 88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숭고한 역사를 되새겼다. 광주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자기를 희생해 민족의 혼을 깨웠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왜 나주에서 출발해 광주에서 분출될 수밖에 없었을까? 

 

나주에서 처음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일제의 수탈이 있었다. 목포와 군산은 쌀을 착취하기 위해 개발된 도시였고, 나주는 영산강 뱃길을 따라 목포와 곧바로 연결돼 있었다. 1920년대 나주지역 조선인은 16만1822명이었다. 이들이 소유한 1인당 토지는 317평에 불과했다.

 

반면 3788명의 일본인은 1인당 9852평의 농지를 소유했다. 무려 30배가 넘었다. 수탈에 대한 분노가 박준채 선생이 기차에서 사촌 누나를 희롱하는 일본학생에게 주먹을 날린 사건으로 연결된 것이다. 

 

10월30일에 있었던 나주 사건의 소식이 광주로 도착한 11월3일은 휴일이었고, 일본 천황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음력으로 10월3일, 우리에게는 개천절이었다. 그 날 일본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다녀왔다. 조선 학생들은 등교 거부를 선언했고, 심각한 분위기를 느낀 일제는 조선 학생들의 신사 참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다녀오는 일본 학생들과 조선 학생들이 충돌은 당연한 결과였다. 오전 11시에는 옛 광주역 광장, 지금의 동부소방서에서 한·일 학생들의 집단충돌이 일어났다. 광주고보(광주제일고), 광주농고(자연과학고), 광주여고보(전남여고), 광주사범(광주교대) 학생들이 거리로 몰려 나와 시위를 시작하면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을 거쳐 중국과 일본·러시아를 넘어 미국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전국 194개교에서 5만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했다.  

 

 

왜 광주였을까? 이 질문은 광주라는 땅이 간직한 유전자의 문제와 연결된다. 전라도는 동학과 한말의병의 중심이었다. 전라도 안에는 불의를 인정하지 않는 정의로운 마음이 있었다. 1909년 한말의병의 60%가 전라도 사람이었고, 그 정신이 80년 5·18민중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광주는 국가의 명운이 걸려있을 때마다 항상 앞장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거대 공권력과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웠다. 광주지역 학생들이 맨손으로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운동 투쟁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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