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기숙사생들이 미리 받아본 문제지)를 보는 순간, 손이 떨렸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광주 모 사립고 3학년 A군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린 글(페이스북 퍼온 글)의 일부다.
지난 5일 실시된 기말고사 수학문제(기하와 벡터, 확률과 통계) 중 객관식 3문제와 서술형 2문제 등 모두 5문제(총점수 26점)를 상위권 학생들로 구성된 특정 동아리에서 미리 풀어봤다는, 사전 유출 의혹과 관련해 폭로성 글이었다.
사안 자체가 민감하다 보니 이 글은 삽시간에 SNS를 타고 퍼져나갔고, 언론보도와 교육청의 특별감사로 이어졌다.
이 글에서 A군은 “서술형 6문제 가운데 3∼4개 문장이 상식적으로 1∼2등급 밑의 아이들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험이었다”며 “어떻게 그런 문제를 만드냐고 기숙사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 친구가) ‘종이 5장’을 보여줬고 그 종이에는 바로 시험에 나온 객관식 3문제와 서술형 2문제가 있었다.
손이 떨리고 욕이 나오고 분노가 치밀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숙사 친구들은 ‘일요일에 따로 하는 수학수업은 받았고 자습하고 있는데, 시험 출제자 선생님이 종이를 들고 오셔서 갑자기 나눠줬다’고 했다”며 “우리반 기숙사 친구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하다’고 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이 문제를 담임 선생에게 제기했더니, 돌아온 답은 ‘문제가 출제된 특정 모의고사를 돈을 주고 구입해서 풀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기숙사는 공짜로 복사해 나눠주고 우린 알아서 찾아내서 풀어보라는 것은 차별과 무책임”이라고 분개해 했다.
이에 교육감은 “지난해 발생한 모 사립고의 시험지 유출 악몽을 떠올리는 일로 있을 수 없는 문제”라며 엄정 조사를 주문했고, 교육청은 긴급 현장조사에 이어 감사반 20명을 투입해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최근 3년 간 시험지와 답안지, 기숙사 학생 명단 등 관련 자료를 모으고, 다른 과목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는지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광주 교사노조도 성명을 내고 이번 사건을 “재직 교사가 상위권 학생들을 모아 ‘집단 과외’를 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교장, 교감의 관리책임을 엄중히 물고, 교육청 감사가 부족하면 검찰에 고발할 것”을 촉구했다.
광주지역에서 시험지 유출 의혹이 불거진 것 불과 10개월만이다. “재발방지에 힘쓰겠다”며 교육 당국이 수차례 사과문을 내고 고개를 숙인 지 1년도 안돼 터진 일이어서 시민들과 교육 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교육감이 ‘악몽’으로 표현한 모 사립고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해당 학교에서는 지난해 7월 6~10일 기말고사, 4월 25~27일 중간고사와 관련, 시험지 유출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사건에 연루된 행정실장과 학부모가 나란히 징역 1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아들을 의과대학에 보내기 위해 성적 향상에 혈안이 된 ‘의사 엄마’의 과욕과 시험지 원본을 복사한 소위 ‘시험 족보’를 대범하게 유출한 행정실장의 교육적 일탈이 빚어낸 비리였다.
앞서 2016년에는 고3 재학생들을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학생생활기록부를 고의로 조작한 또 다른 사립고 교장과 교사 등 13명이 공전자기록위작 등의 혐의로 사법처리되기도 했다. 현직 교사가 개입됐다는 점에서 이번 의혹과 유사하다.
학교 이미지와 명예를 단순히 ‘명문대 진학생수’로 판단하거나 이를 승진의 도구로 활용하려 한 일부 학교와 교사들의 그릇된 인식은 결국 낙인효과에 따른 입시 낙마 등 상당수 학생들의 진학피해로 이어졌다.
성적 위주 교육방침이 심화반 편성과 교비 전용, 기숙사생만을 위한 그들만의 특혜, 과외 교습, 금품수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늘 제기되고 있지만 여러 교육계 현실상 뿌리뽑기는 요원한 상황이다.
더욱이 생기부 조작이나 시험문제 유출은 ‘2등급 학생은 절대 1등급이 될 수 없다’는 보이지 않는 장벽과도 같은 것이어서 철저한 조사와 대응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다.
교육계 한 관계자는 8일 “시험지 유출 의혹이 일고 있는 학교는 몇 년 전 동아리 활동을 위장한 공휴일 기숙사반 특별수업으로 신고당한 적이 있는 바로 그 학교”라며 “되풀이되는 학사비리에 대한 근본적이고 영구적인 처방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