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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에서 서울시장, 그리고 대선주자…삶 자체가 실험이었던 박원순

10일 숨진 채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은 역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자 더불어민주당 내 유력 대선주자 중 한 명이었다.

 

3선 서울시장에 당선된 박 시장은 20년이 넘게 시민사회에서 활동해온 한국 시민운동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서울시 10년 혁명’을 완수하겠다고 서울시민과 약속하며, 더 큰 소명의식과 권력의지를 다졌던 박 시장은 검사에서 인권변호사로, 시민운동가에서 모금 전문가로, 그리고 서울시장으로 변신했다.

 

항상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던 그의 인생은 ‘대통령 선거’라는 큰 꿈을 앞두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부동산 대책’ ‘전국민 고용보험’ 등 핵심 이슈를 선도하며 대선으로 가는 길을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그런 박 시장은 지난 9일 실종신고가 된 지 약 7시간만에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대선의 꿈도 이룰 수 없게 됐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서울시에 입성한 박 시장은 변호사 출신의 ‘진보적 시민운동가’로 대표된다.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시절에는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해 경기고에 입학했다.

 

법조인의 꿈을 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한 지 3개월 만인 1975년 5월 고(故)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제22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대구지검 검사로 재직했으나,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사표를 썼다는 게 박 시장의 설명이다.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박 시장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등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박 시장은 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으로 주목받았다. 직장내 성희롱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최초로 갖도록 한 이 사건은 6년의 법정 공방 끝에 1998년 서울고법에서 승소하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1994년에는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면서 박 시장은 시민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약하면서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선운동’, ‘1인 시위’ 등을 벌이며 정치권과 사회에 새로운 개혁 방안을 제시하며 주목을 받았다.

 

시민운동을 우리사회에 정착시킨 박 시장은 2000년부터 ‘기부·나눔·참여’에 관심을 두며 또 한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 가게도 열었다. 2006년부터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재직했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관협치 기관으로 평가받는다. 

 

그랬던 그가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했다. 사상 처음으로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으로 대중 정치의 영역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은 많았다. 박 시장이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뒤부터 여권의 검증 공세가 이어졌다. 병역, 가족사, 학력, 과거 이력 관련 의혹이 쉴새 없이 제기됐다.

 

결국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양보로 단일화되면서 당선에 성공했다. 서울시장이 된 박 시장은 재선에 당선된 이후에도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도시재생 등 자신이 꿈꿨던 수많은 사회혁신 정책을 하나 둘씩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중도포기 했으나, 서울시 최초로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박 시장은 ‘서울 10년 혁명 완수’라는 큰 목표 아래 자신의 정체성과 같은 ‘시민과의 협치’, ‘경제’, ‘평화와 안보’ 등 굵직한 정책을 내놓았다. 협치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서울시 위원회는 2011년 103개에서 2017년 7월 189개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유망 스타트업 100개사를 선정해 제품화부터 판로개척, 지식재산권 출원까지 기업당 1억원의 ‘성장촉진 종합패키지’를 지원, 성장기 스타트업 전용 펀드를 1150억원 규모로 조성해 기업당 최대 30억원 이상을 투자, 바이오·의료 산업, 핀테크·드론·로봇 등의 산업을 전략산업 집중 지원 등에도 앞장섰다.

 

서울-평양간 적극적인 도시교류를 통해 서울 테두리 안에서 한계에 도달한 여러 산업들을 북한의 노동력과 결합해서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올해 1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하면서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에 성공한 서울시가 ‘익명검사’, ‘고위험군 선제검사’ 등을 제시하며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방역의 표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박 시장은 시장 마지막 임기, ‘서울 10년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강남·북 균형발전’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강남과 강북이 격차를 없애 서울이 고르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시민들이 체감하는 삶의 변화를 이뤄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더 큰 꿈을 꾸겠다는 목표도 있었다.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일명 ‘박원순계’라고 불리던 이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하면서 박 시장의 큰 꿈은 한층 더 탄력을 받기도 했다.

 

박 시장은 3선 시장으로서 임기 반환점을 돈 지난 6일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안 되고 싶어도 하게 되는 운명적인 직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시 10년 혁명’ 완성을 1년 2개월, 대선을 1년 6개월 남짓 남겨두고 박 시장은 2020년 7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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